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동원/선수 경력 (문단 편집) ==== 그 이후, 1985~1987시즌 ==== [[https://m.sports.naver.com/kbo40/history/15|히스토리 15 김시진 vs 최동원 '최초 100승' 전쟁]] 결국 1984년의 혹사는 이후 최동원의 선수생활을 갉아먹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한국시리즈의 혹사만 생각하는데, 당해 최동원은 페넌트레이스에서도 기록적인 혹사를 당했다. 전년도의 [[장명부]]에 비견될 만한 혹사였다. 총 51경기 중 선발로 20경기를 나와 14경기를 완투했고, 계투로 31경기를 나와서 거의 300이닝에 근접한 투구를 했다. 현대야구의 관점에서 보면 선발로 등판한 경기를 다 빼고(150이닝 가량을 빼고) 구원등판한 경기만 봐도 상당한 수준의 혹사다. 최훈은 이 당시를 그리면서 롯데가 리그 최강의 투수진을 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최고의 선발진 최동원과 최고의 계투진 최동원(...) 하지만 1984년의 엄청난 혹사에도 1985년에는 20승을 달성하고 1986, 1987년까지 꾸준히 두자리수 승수를 올리는 등 초인적인 활약은 지속되었다. 선동열과 그 유명한 15회 완투 대결도 바로 1987년에 나온 것.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최동원이 비교적 이른 은퇴를 한 것은 혹사로 인한 후유증도 후유증이지만 그보다는 선수협 창설 시도로 인해 구단의 눈밖에 나서 삼성으로 ~~버림받은~~ 트레이드를 당한 충격과 그로 인해 야구에 대한 동기부여와 의욕이 상실되는 정신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는 롯데맨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구속이 많이 떨어졌고 변화구 궤적의 수준도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정신 충격이 혹사보다 더 높은 비중의 원인으로 보는 건 부적절하다고 보는 쪽도 많다. 롯데에 대한 자부심도 컸지만 한국 야구의 스타선수로서의 자부심 역시 컸던 최동원이 아무리 모욕적인 상황이라 해도 자기가 그만두면 뒀지, 팀에서 쫓겨났다고 현재 소속팀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지 않을 성격과 인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은퇴 후 세월이 흐른 후의 인터뷰에서도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팀과 팬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본인의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구단에 우승을 안겨준 선수에 대한 롯데의 태도는...이 때문인지 아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진 안던질거다"라는 말도 남겼다.[* 정확히는 마지막이 배신(강제 트레이드)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